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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마고영 2011. 7. 4. 16:17

 

 

 

 

 

 

각설이 



각설이라 함은 장타령꾼을 낮게 잡아 이루는 말로

각설이 패거리에서는 장타령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런데 각설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물리칠 각 (却)을 쓰기도 하고

깨달을 각 (覺)을 쓰기도 한다.

 

사전에는 물리칠 각으로 되어 있지만, 어원이나 유래에서는 깨달을 각을 썼다.

먼저 유래를 살펴보면 각설이의 기원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자,

당시 지배계층은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지로 변장하거나 정신병자 혹은 병신으로 위장하여 걸인 행각을 하였다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세조실록에

1456년 직제학 눌제 양성지(1415~1482)는 상소를 통해

악기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엄히 금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각설이가 기록된 문헌은 송순(1493~1583)이 지었다는 타령과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낙향하면서 걸인 행각 중 불렀다는

천자풀이 등이 전하며, 신재효(1812-1884, 전북 고창)의 변강쇠에게서도

품바의 뜻이 '입장고'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으므로

각설이는 조선불교의 조직체계인

향도의 거사걸립패를 중심으로 결성된 패거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불법화된 조선불교가 포교대상인 백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성이 모이는 시장밖에 없었다.

이들은 승복을 벗고 민간 복장으로 일반인의 말로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염불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염불을 외고 후반에는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가락과 춤으로 흥을 돋우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염불은 노래 속으로 스며들었고, 차츰 농요의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이는 남부지방의 선소리인 ‘보렴’, ‘화초사거리’ 등의 노랫말이

거사 사당패들이 부르던 염불의 특성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완도와 진도 등 남도의 도서연안지역에서 구전되고 있는 품바타령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걸립패의 출발도 불교집단이었다.

수행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역할을 나누었던 사판승들은

서당걸립패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시주를 독려하며 고사염불 기원을 했는데

이는 고사소리를 하는 판소리 광대들을 비나리꾼으로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런 가락들은 회심곡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현대의 사물놀이패의 ‘비나리’는 걸립패의 ‘뒷염불’ 중 ‘평염불’, ‘덕담’,

‘반맥이’, ‘오조염불’ 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련사와 원각사, 청룡사 등이 사당패들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각설이(覺說理)는 ‘깨달음을 전하는 말’이라는 불교용어이며

동냥도 ‘승려들의 탁발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유학자들이 이를 거지들의 구걸행위로 의도적으로 낮추어

물리칠 각 (却)을 써서 却說이라 부르고 동냥이라 한 것이다.

백과사전에서는 동냥을 풀이하기를 

탁발을 나가는 스님들이 동령(動鈴)을 들고 흔들기도 하였는데,

그 동령에서 파생된 말이 동냥이라고 하였다.

 

 


품바의 춤은 대안대사의 동발무나 혜공대사의 부궤무,

원효대사의 무애무 등이 그랬듯이 자유스럽고 호방한 형식이었다.

품바의 악기는 지금처럼 사물을 사용했다기 보다는

스님들이 사용했던 놋쇠로 만든 탁발그릇이나 박 바가지 등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각설이는 일제 강점기 때 나름대로 조직적으로 일본 왜경에 대항하였다.

장터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때 구걸을 하는 척하며

품바 노래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주눅이 들지 말고 저항할 것을 촉구하였다.

 

 

각설이가 왜경에 대항한 것은 소위 호국 3부경(三部經)이라는

〈법화경 法華經〉금광명경 金鑛明經〉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등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불법은 국가 민족의 복리(福利)를 기원하는 교법으로서 

만약에 국난이 일어나면 호국의 의무행위로서 칼을 들고 총궐기해야 한다.

"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승려가 군사로 출전하는 것을 허용했기에

임진왜란 때에도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승려가 왜적과 크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왜경의 지속된 탄압 때문에 각설이는

일본 강점기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해방되자 다시 나타났다.

 

 

각설이 타령이 가장 활발히 불리고 알려진 시대는

해방 직후로부터 6.25와 자유당 시절로서 전국적으로 퍼져

그중 지각 있는 각설이들은 자유당 독재의 행각을

각설이 타령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각설이의 상징처럼 보이는 찌그러진 깡통은 6. 25 이후 등장한 것으로 보면 된다.

공화당 때는 독재에 항거할 것을 염려해서인지 1968년,

법으로 걸인 행각을 금지하면서 또다시 전국에서 각설이가 사라져야 했다.

 

 


품바타령의 원래 명칭은 각설이타령이고

지금 품바타령으로 통칭한 이유는 1982년 연극 <품바>의 공연 이후

품바라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원래 각설이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좋은 의미에서 시작했으며,

나라가 어수선하면 각설이가 나타나

백성의 마음 깊숙한 곳에 쌓인 울분과 억울함,

그리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등 피지배 계층에 있는 사람을 대변하여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백성을 억압하는 지배층에게 "입으로 뀌는 방귀"라 하여 "입방귀"를 풀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 몰지각한 엿장수나 품바꾼들은 각설이의 본질을 모르고

각설이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음담패설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돈벌이로 이용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게 승계하여야 할 소중한 문화가 물질 만능주의 탓에

그 뜻이 우습게 변질해가고 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중국이 아리랑을 자기네 무형문화재로 등재하듯이

각설이 역시 어쩌면 중국 문화의 일부분으로 기록할지도 모를 일이다.

 

 

 

휴~~~